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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보/정서, 문화 정보

[영웅] 대한의 영웅, 안중근을 잠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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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맞이하여,

 

집에만 있기에는

 

무언가 아까운 마음에

 

아이들과 함께

 

아침일찍 나서서 영웅 안중근을

 

영화로 잠시 만나고 왔다~

 

용산 아이파크몰 CGV 영웅 플랫폼에서~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이 되어

 

더욱더 가슴을 울리는 

 

장면들이 묘사되었고,

 

보다 사실적으로 그려져

 

마음에 더 깊이 담아졌던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어서 만족^^

 

아이들과 함께

 

역사의 장면에 한 걸음 더

 

들어간 것 같아

 

이것만으로도

 

뜻깊은 성탄절이 아니었나 싶다.

 

안중근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하얼빈 의거로 많이 알려졌지만

안중근 의사는

그 외에도

의병을 이끌고 교육 사업을 벌이는 등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어요.

지금부터 안중근의 생애를 통해

그가 남긴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 봐요~

 


 

 


1879년도

출생과 집안

: 안중근은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지요.
  
  태어났을 때 몸에 7개의 점이 있어서 '응칠' 이라고도 불렸다고 해요.

  안중근은 할아버지가 곡식 장사로 큰돈을 벌어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아버지 안태훈은 급진 개화파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들 정도로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인물이었는데요.

  후에 안중근을 천주교와 개화사상으로 이끈 사람도 아버지였다고 해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 조마리아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꺼이 가지고 있던 패물들을 내놓았고,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라고 말할 정도로~

 투철한 독립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아들이 죽은 후에도 조마리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고 해요.

 

1894 ~ 1897년

안중근의 소년 시절

: 1894년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은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지만, 가짜 동학군이 나타나 백성들을 해치고

  약탈하는 일이 있었지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꾸렸고,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사냥을 잘했고, 명사수이기도 했던 안중근도 16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가짜 동학군을 진압했다고 해요. 안중근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해요.

 

 

1905 ~ 1906년

을사조약과 애국 계몽 운동

: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에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어요.

  이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왔는데, 이토는 친일 단체를 조직해 우리민족을 분열시키고

  문화유산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앞장섰지요.

  신문과 잡지를 꾸준히 읽어 세계정세에 밝았던 안중근은 나라를 구할 방법으로 교육을 우선시 했어요.

  그래서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자신의 재산을 들여 삼흥학교를 세웠고, 돈의학교를 사들여 교장으로 취임했지요.

  그리고 군사훈련을 교육 과목에 포함해 총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치며 일본에 맞설 수 있는 인재를 기르려고 했다고 해요.

 

 

1907년도

국채 보상 운동

: 1907년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키겠다는 구실로 큰돈을 빌려주고 갚을 것을 요구했는데요,

  우리 정부가 갚을 능력이 되지 않자 대중이 나서 나랏빗을 일본으로 부터 독립하자는 뜻으로 모금 활동을 펼친 거예요.

  국채 보상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여러지역으로 번졌는데,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으며 적극벅으로 참여했어요.

 

 

1907 ~ 1908년

정미 7조약과 독립운동

: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본은 고종 황제를 강제 폐외하고 각 나라의 대표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정미 7조약을 맺었지요. 그 결과 우리나라는 군대가 해산되고,

  사법권을 빼앗기는 등 사실상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요. 이에 안중근은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했어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간 안중근은 최재형 등 한인들의 도움을 받아 1908년 의병 부대 참모중장으로

  활동하며 두만강 근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하지만 만은 수의 일본군을 당해 내기에는 무리였지요.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 최재형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7세부터 장사로 큰 돈을 벌었어요.

  그는 자신의 사업체에 우리나라 사람을 고용해 경제 활동을 도왔고,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는

  " 러시아의 추위보다 나라를 읽은 마음이 더 춥다." 며 전 재산을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데 썼어요.

  특히 최재형은 낯선 러시아 땅에 도착한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안중근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가족을 돌봐 주었다고 해요.

 

1909년. 2 ~ 3월

손가락을 끊은 맹세

: 일본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1909년 안중근은 새롭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다졌어요.

  동지 11명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맹세하며,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피로 태극이에

  "대한독립" 글자를 쓰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이를 "단지 동맹" 이라고 하지요.

  이들은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의 원츙이던 이토 히루부미와

  친일파 이완용을 암살하기로 마음먹었어요.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총소리

: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에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독립운동가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과 의거를 계획했지요.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이토가 도착하자 안중근은 총으로 가슴과 옆구리 ,복부를 명중시켰고,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어요.

  이 사건은 세계에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고, 침체되어 있던 항일 운동이 다시 활성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요.

 

최후의 유언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2월

재판장에 선 안중근

: 체포된 안중근은 뤼순 감옥으로 옮겨져 재판을 받았어요.

  이때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등 이토의 죄를 15가지로 들어 

  거사 이유를 밝혔지요. 그리고 "한 나라가 다른 나나를 침략해 빼았으면 모든 나라들이 나서서

  구해 주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맺었다 해도 자기 나라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조약을 포기할 수 있다" 는 "만국공법"에 따라 판결해 달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를

  논리적으로 비판했어요. 또한 안중근은 중국, 일본, 대한제국 등 아시아 나라가 대등한

  독립 상태여야 한다는 "동양평화론"을 펼쳤어요.

 

1910년. 3월

안중근의 죽음

: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 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어요. 그는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일을 미뤄 달라고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안중근의 유해는 어디에?

: 지난 10월 국가보훈처는 안중근의 유해가 하얼빈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돼 뤼순 감옥 공동 묘지에 묻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당시 신문 기사를 발굴 및 공개 했다고 해요. 지금껏 찾지 못한 안중근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고 있지요.


현충원 가묘 안장 논란?

: 현충원에 안중근의 묘가 없는 것도 논란이 됐어요. 국립묘지법상 유골이나 시신을 찾지 못하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안중근 뿐만 아니라 유관순, 김규식 등 유해를 찾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가묘를 현충원에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요.


동양평화론의 행방?

: 동양평화론은 동양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내욜을 담은 안중근의 미완성 저서이지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동양평화론은 한 일본인이 원본을 따라 적은 필사본으로, 재일 사학자 고 김정명 교수가 찾아내

  세상에 알렸고,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어요. 하지만 동양평화론의 원본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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